파리, 기억의 습작 (Paris, Etude de la mémoire)
바다 속에 몸을 내던져 그 속을 눈에 담고, 잔잔히 흔들리는 파도를 느껴보며, 가끔 만나는 해양 생물체에 예술적 영감을 얻는 사람이 있다. 작가 윤혜영이다. 내륙 지방인 파리에서 줄곧 살던 그에게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은 꽤나 유쾌한 일이다. 방방곡곡을 다니며 바다 수영을 즐기는 그에 따르면, 우리 나라의 많은 해변 중에서도 해운대 바다는 따뜻하고, 파도가 잔잔하며, 바다 속은 훤히 들여다 보일 정도로 깨끗한 편이라고 했다. 매일 아침 해운대 바다 수영을 하며 안락과 평화를 느꼈던 윤혜영은 해운대를 자신의 전시 장소로 택했다.
윤혜영의 작품세계에서 ‘여성성’이라는 서두를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윤혜영의 롤 모델이자 작품에 많은 영감을 주었던 뮤즈는 현대미술의 아이콘 ‘루이즈 부르주아’다. 그 이유를 물으니 ‘여성성’이라는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답이 돌아왔다. 평생을 가족에 헌신하고 희생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거미로 은유한 루이즈 부르주아의 대형 청동 조각품이 그에게 깊은 여운을 주었던 것일까? 그의 작품에서도 강인한 여성상이 묻어났다. 그의 드로잉 곳곳에서는 상징 소재들을 볼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문어”다. 알에서 새끼가 깨어날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지키고 보살피는 암컷 문어의 모성애와 무성생식을 하는 생물학적 특성을 작품에 녹여내 여성성을 강조했다. 더불어 “근대화”를 “유토피아”로 해석하며 또 다른 작품 속 소재들을 그의 세계관에 비유했다. 그의 세계관은 유학 생활을 하던 시절, 느꼈던 지역 감수성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파리에서 겪었던 인종, 성차별은 예술과 낭만이 넘치는 세계 문화 중심지인 만큼 시민의식 또한, 자유롭고 온화할 것이라 여겼던 환상을 무너트리고, 생각과는 다른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작품으로 해소했다. 그가 이제껏 고대하던 몽상 속 파리의 모습을 드로잉으로 표현한 것인데, 파리의 지도를 마치 거미의 집과 같이 묘사했고, 콧대 높은 파리지엥(Parisien)을 프랑스의 대표 패션 브랜드 디자이너 “코코 샤넬(CoCo CHANEL)”에 비유하여 풍자했다. 또한, 프랑스 혁명이 자연스레 연상되는 “마리안느(Marianne)”를 작품에 인용하여 진부하기만 했던 파리와 대조되는 모습으로 도시에 대한 작가의 답답함을 표출했다. 파리에서 만났던 대부분의 인연들이 내면보다 외면에 의존해 타인을 판단해버리는 경향을 확인하면서 파리를 근대화에서 멀어진 정체된 도시,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 이면의 모습이라 인식했던 것이다.
환상을 현실적으로, 비난을 예술적으로, 직설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윤혜영의 파리는 여성이 가정이 아닌 사회적 위치에서 자리매김하는 오늘과 많이 닮았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듯한 파리의 시간도 윤혜영의 도시에서는 흘러간다. 변화와 실패를 직면하면서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투영해 그의 작품을 경험해보는 것은 어떨까? 모더니티(Modernity)를 넘어선 부산의 ‘내일’을 말이다.
작가노트
파리의 이미지를 뭐라고 해야할까?
나에게 파리는 낭만, 예술, 패션, 음식, 문화의 수도라는 이미지보다는 19세기 보들레르(Charles Beaudelaire)가 느꼈던 고독하고 차가운 도시, 제 2제정 시, 일어난 오스망(Raoul Hausmann)의 근대화 프로젝트가 여전히 지배하는 근대 공간이다. 파리는 이전에 내가 살았던 프랑스의 중세의 모습을 보여주는 부루즈(Bourges)의 옛 시골 분위기도 스위스를 국경으로 두고 자동차와 직물의 산업화를 보여주는 물루즈(Mulhouse)의 독어와 프랑스어가 섞인 분위기도 아니었다. 파리는 오스망의 계획도시로 도시 재정비가 이뤄지고 자본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역사를 보존한 나이든 근대 부르주아 도시이다.
2013년 파리를 살 때, 보들레르처럼 도시를 여기저기 다니면서 그가 주장한 ‘플라네르(Flâneur)’ 정신으로 도시 곳곳 여기저기를 다녔다. 특히 아시아, 라틴, 유대인과 같이 인종과 대륙을 나눠서 “게토(Ghetto)”화를 이루고 아프리카 와 아시아 시장 물품을 따로 파는 시장이 특정 구역만 몰린 것이 마치 우리가 중국인을 구분해서 만든 차이나타운같이 느껴졌다. 어느 도시나 구역마다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파리같이 작은 도시에서 21세기가 들어선 지금까지도 구역의 사람들이 업무 이외에는 자주 다른 구역으로 이동을 하지 않는 점이 뉴욕이나 서울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파리 사람들이 가는 곳만 가고 특정 지구만 머무르려는 점이 최근에야 다양한 식문화와 레스토랑 문화로 달라지고 있지만, 여전히 지구를 하나로 유리하며 오히려 다른 문화와 인종과는 교묘히 분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80년대 생으로 한국의 아파트 신화를 겪은 세대이다. 도시화가 엄청 빠른 속도로 진행되며 우후죽순으로 들어 선 아파트와 빌라를 보며 자랐다. 한국의 옛 풍습을 그대로 지키면서 마르지 않은 콘크리트 건물 안에서 잠을 자고 컸다. 나에겐 파리의 공간은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의 다름을 넘어 프랑스의 근대를 지키고 거기서 문화적 마케팅을 하며 관광으로 돈을 버는 공간으로 보였다. 그래서 나에겐 파리는 아름답지만, 한편으로는 늙고 답답한 도시 구조였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즉 한 공간에 옛 것과 새 것이 공존하고 주관적이고 맥락적 해석을 받아들이는 ‘후기 근대주의’ 건축 사상을 직접 경험한 나는 파리와 파리지앵의 보이지 않는 분할 방식이 답답하게 왔다.
한국은 건축의 근대주의와 후기 근대주의를 빠른 산업화와 경제 성장으로 60년대부터 80년대 90년대까지 총 30년 만에 다 겪었다. 이런 큰 가속도의 건축신화 덕분에 나는 ‘공간적 멘탈붕괴’의 나라에서 나의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내다 유럽에서 유학을 했다.
특히 파리를 경험하며 근대 도시의 역사를 배우며 도시와 자본에 대한 관계를 잘 보게 되었다. 파리에서 나는 한국에 서 온 이방인으로 내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인종, 돈, 계급, 권력으로 좌지우지되었다. 역사적으로 유지된 절대적 공간은 여느 도시 공간처럼 여러 보이지 않는 기호와 상징으로 이뤄졌고, 오직 허용된 그룹만이 이 곳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을 재확인하였다. 이는 이탈리아 건축가 까를로 아이모니노(Carlo Aymonino)처럼 ‘도시는 권력 그 자체’를 증명해줬다. 난 파리가 자유롭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쁘렝땅이나 라파예트 백화점처럼 쇼핑을 하는 자본주의 공간과 큰 공원, 여러 문화적 혜택을 주는 공공 박물관 이외에는 내가 파리지엥처럼 옷을 잘 차려 입지 않으면 프랑스어를 완벽하지 않으면 들어가도 행복과 자유를 느끼기에는 불편함이 적지않게 있었다. 그만큼 파리는 절대 권력을 가진 도시로 근대 도시의 대표적인 예로 유지되고 또한 파리지엥은 콧대가 세다는 루머가 있는 것 같다.
난 늘 어려서부터 자유로운 도시를 꿈꿨다. 세계 어느 곳에 어떤 도시에는 분명 내가 찾는 어떤 유토피아적인 공간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살았다. 내가 유학 시절에 알게 된 1950년대를 거쳐 60년대가 오면서 서유럽의 파리 중심으로 이뤄진 예술가들의 모임 ‘국제 상황주의자들(Situationistes Internationales)’의 도시 이론과 네덜란드 콘스탄트 니유엔휴스(Constant Nieuwenhuys)의 “신 바빌론(New Babylon)” 프로젝트는 자유로운 도시를 꿈꾸는 낭만적이고 창의적인 도시 시민 주장을 주장하고 예견한다. 이는 나의 꿈이 혼자만이 아니란 것을 알려줬다. 이 시민은 이들의 주장에서 도시의 여러 구역을 다니며 스스로의 상황을 만드는 ‘상황주의자’로 도시 공간에 이곳 저곳을 자유로이 이동하며 재미와 유희를 찾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로 묘사된다. 나 또한 이런 시민이 되는 것을 꿈꿨다. 이들이 펼친 이론이 오늘날 유행하는 ‘노마드(nomad) 문화’와 스마트폰 세계와도 유사하며 얼마나 아방가르드였는지 증명한다. 이들의 움직임은 모두 근대 도시에서 탈피하는 개인의 민주적인 공간 창조를 바탕으로 하며 오늘날 도시의 발달에는 서양과 동양할 것 없이 모두 제한이 없는 자유로운 공간을 꿈꾼다는 것이다.
내가 올해 다시 찾은 파리는 3년전 내가 떠날 때와는 약간은 다른 모습이지만, 여전히 장미처럼 가시를 지닌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인의 문화 유산을 보호하는 철두철미한 습성 속에서 근대 파리를 지키고 있었다. 파리는 코로나로 인해 흥망성쇠를 하는 도시의 상업적 공간에 약간의 변화만 있을 뿐 본 ‘장미’를 유지하고 있었다. 난 3개월 내내 파리 20지구를 기본으로 깔고 드로잉을 하였다. 드로잉 속에 파리를 상징하거나 도시의 이미지와 결부되는 관광적인 공간이나 상징물을 다른 것들로 바꾸거나 변신시켰다. ‘사랑의 도시’라는 전형적인 이미지나 오스망의 아파트 신화를 넘어서 한국의 보통의 어디 가나 볼 수 있는 건물과 전통적 요소를 파리 도시 안에 이미지에 섞었다. 파리의 지도를 거미집과 같이 유사하게 그리고 파리의 오랜 역사와 거미를 결부시켰다. 또한 내가 좋아하는 상징적인 기호를 여러 개를 섞어 나만의 유토피아적 공간을 만들어 갔다. 프랑스대혁명 이후, 등장한 서민 캐릭터 ‘마리안느(Marianne)’를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해서 여러 번 그렸다.
유토피아는 내 안에 있기에 파리가 어떻게 변하든 내게 변화되는 기억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다. 비디오에서 오스망의 프로젝트를 분석하면서 느꼈던 파리는 300장의 드로잉을 끝내고 내가 느꼈던 파리라는 도시와는 또 틀렸다. 또한 한국에 와서 페인팅을 하면서 나의 파리 체류는 더 발전된 기억 속에 있게 되었다. 페인팅 속에서는 파리의 근대화 보다는 나의 상상적 공간에 대한 갈망이 더 커졌다. 결국 도시는 도시인 것이고 내가 생각하는 이 도시에 대한 기억은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윤혜영
윤혜영 YUN HyeYoung
학력
2021 한국 해양대학교 국제대학 유럽지역학 박사
2013 프랑스 부루즈 국립 예술학교 석사 DNSEP(Ecole nationale supérieure d’art à Bourges) 예술학
2011 프랑스 부루즈 국립 예술학교 DNAP(Ecole nationale supérieure d’art à Bourges) 예술학
전시
2022. 《파리, 기억의 습작》, 부산 프랑스문화원 ART SPACE, 부산
2021. 《MASS》, 김포 CICA 뮤지엄, 김포, 경기도
2013. 《John Doe》, 2014 프랑스 부루즈 프리쉬 앙트르 포 (Un futur arrive à son terme), 파리, 프랑스
《Sympathie》, 프랑스 파리 한인 여성회(Kowin) 퐁데자르 갤러리, 파리, 프랑스
《슈타트베팅 Flamingo Festival》, 베를린, 독일
《Morceaux Choisis》, 물루즈, 프랑스
《Eccentricités Festival》, 브장송, 프랑스
2012. 《Traverse Video Festival》, 툴루즈, 프랑스
2011. 《Change》, 노이뮌스터 사원, 룩셈부르크
《Eccentricités Performance Festival》, 브장송, 프랑스
2010. 《“Utopic diary?”》, 노이뮌스터 사원, 룩셈부르크
《Nos Yeux Grands Ovuerts Festival》, 상카트르, 파리, 프랑스
《Les Champs libres Festival》, 현대 아트 뮤지엄, 스트라스부르그, 프랑스
2009. 《E-magiciens Media Festival》, 발랑시엔, 프랑스
《생태계보존 단체 프로젝트 Rekult 2 “Kulturmix”》, 룩셈부르크
《“African décalage” Mesia Festival》, Bandits-mage, 부루즈, 프랑스
2008. 《“Something about Compostella”》, Schöne Künste, 자부리켄, 독일
2007. 《쿤스트질로 Standpunkt “Perspektiv play”》, 자부리켄, 독일
제목입니다